오랜만에 횡수에 들어왔더니 ‘내 사랑 한동’에 대한 이야기가 잠시 나왔었네요. 그래도 좋은 의견들을 펼쳐주시는 선배님들이 남아있어 감사한 마음이 듭니다.
1. 논의 양상에 대해.
저도 사실은 ‘내 사랑 한동’을 다시 언급하는 것이 과연 의미가 있는 것인가 하는 생각이 들 때가 있습니다. 더 나아가, 이제와서 ‘내 사랑 한동’을 언급하는 것이 어떠한 작용을 하는가에 대해서도 생각해 볼 때가 있습니다.
‘내 사랑 한동’을 언급하는 것 자체가 일종의 현실도피로 작용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때가 있습니다. 현실을 도피하기 위해 인간이 취하는 방법이 여러가지가 있겠지만, 그 중 대표적인 것이 ‘천국’만을 말하는 내세지향적 종교처럼 아주 먼 미래에 대해서만 언급하는 경우고, 또 다른 반쪽은 아주 먼 과거의 것들(이상향이나 추억?)을 언급하는 것입니다. 이 둘은 방향은 다르지만 현실을 도피하고 있다는 점에서 동일하게 부정적인 면을 지닙니다. 그런 의미에서 현재의 현실에 대해서는 이야기 하지 않고, 과거 선배들의 문건인 ‘내 사랑 한동’에 대해서만 언급하는 것은 아무래도 뭔가 부족한 것 같습니다. 더불어 ‘불온문건’을 읽는다는 짜릿함과 이것을 언급함으로써 얻게 되는 어떤 ‘자아상’을 즐기는 측면으로 이용되지는 않을까 하는 생각도 해보는 것입니다(정신적 자위행위는 어디에서나 일어날 수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의 사실로써 인트라넷에서 과거의 인물들이나 과거의 사건을 이야기 했던 모든 논의들은 대게 "과거에 별스럽게 시끄러웠던 인물이 있었다."정도의 수준으로 끝나는 경우가 허다했습니다. 그들이 왜 그렇게 시끄러웠는지에 대해 구체적으로 논의가 진행되지는 않았었습니다. 더 나아가, 현재에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할지에 대한 결론은 나오지 않았습니다. 제가 생각할때 이 같은 ‘과거’에 대한 논의들의 한계는, ‘과거’ 사실에서 의의를 끌어내지 못하는 현재를 사는 우리들의 한계로 보입니다.
이 같은 한계가 현재 이루어지고 있는 ‘내 사랑 한동’에 대한 이야기에서도 동일한 양상으로 나타나는 것 같습니다. 다시 ‘내 사랑 한동’을 언급하시는 학우분께서는 그것이 다시 읽혀져야만 하는 의의를 다른 분들에게 납득시킬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특히나 ‘내 사랑 한동’의 경우에는 공식적으로 ‘역사’의 지위를 얻지 못했습니다. 제가 볼때는 오히려 이들은 ‘역사’의 지위를 획득하지 못한 ‘전설’로 이야기 되어야 할것이며, 여기서 또 이들의 이야기가 ‘역사’로써의 지위를 얻지 못하게 된 외적인 힘들에 대해서도 고민되어야 할 것이라는 생각입니다.
모든 과거의 일이 현재에 있어서도 유의미한 것은 아닙니다. 하나의 큰 개념으로 ‘역사’를 공부하라는 이야기를 하기는 쉬워도, 과거의 특정 사건이 현재에 있어서도 우리에게 유의미한 것이라는 주장은 쉬운 것이 아닙니다. 모든 과거의 일들이 ‘역사’라는 개념으로 뭉뚱그려져 학습해야 할 대상으로 여겨진다면, 이야말로 학습 근거에 대한 설명은 결여된체, 반계몽 적으로 주입되는 것에 다름 아닙니다. 과거의 모든 것들을 읽는 학우님들은 다시 ‘현재’로 돌아와야 한다는 것을 염두하고 대하셨으면 합니다. 아마도, 최근에 이루어진 논의에서 불합의가 이루어진 것은, 과거의 한동은 과거의 한동이고 현재의 한동은 다르다는 인식을 가지고 ‘내 사랑 한동’은 다시 읽혀질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시는 분들에게 ‘내 사랑 한동’은 읽혀져야 한다고 생각하시는 분들이 그 의의를 설명해야 할 의무를 다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생기는 것은 아닌가 하는 것입니다.
2. ‘내 사랑 한동’에 대한 평
저는 결론적으로 ‘내 사랑 한동’이 현재에 있어서도 우리가 직면하는 문제들과 동일한 문제들을 다루고 있기 때문에, 아주 유효한 문건이라고 생각합니다. 최근에는 거의 언급도 되지 않는 한동의 ‘정체성’ 문제를 다루는 것 외에도, 언급된 한동의 민주성, 교수임용, 신앙교육의 문제, 교육문제, 연구대학이나 교육형대학이냐의 문제, 등은 최근에도 문제시되는 사안의 핵심 내용이었습니다. 이 같은 문제들은 아직도 같은 내용으로 제기되고 있으며, 이들이 우리보다 먼저 이 주제들에 대해서 고민한 결과물이라는 것은 부정할 수 없습니다.
‘내 사랑 한동’은 ‘홀리’하고 ‘착한’ 학우들을 결국에는 이 땅의 부조리에 대해 입 밖으로 토로할 수 밖에 없도록 만든 당시 현실의 결과물입니다. 물론, 한동사회를 비판하는 목소리들은 상당히 많았습니다. 대표적으로 ‘시끄러웠던 학생’으로 밖에 평가되지 않는 ‘나단’도 있었지만, ‘내 사랑 한동’에서 특히나 주목해야 봐야 할 점은 그 문건을 작성한 학우들이 교내 ‘주류’문화의 대표들이었다는 사실입니다.
혹자는 이들이 결국에는 ‘사과’를 하고 끝나버렸다며, 이 문건의 의의에 대해서 평가절하하는 목소리를 들을 수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는 앞서 말한 그들에게 압력을 가한 다른 외적인 요인을 무시한 평가입니다. 그들이 그 ‘압력’에 굴복했다고 해서, 그들 목소리의 의미가 퇴색되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그들을 굴복시킨 외적인 힘은 그들의 주장을 ‘실증’ 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문제인식을 가졌던 과거의 한동과 현재의 한동은 과연 다를까요? 지금 아주 가까운 실례로 ‘식대 인상’에 대해서 생각해 봅시다. 우리들은 ‘식대 인상’에 대해서 아무런 투명한 자료를 얻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학생식당 운영을 통해 이윤을 남겼다는 발표만 들을 수 있었습니다. 총학생회는 단지 한번의 반대의사를 표명했다는 이유만으로 한 교수의 역정내는 전화를 받았다고 하네요. 이같은 불투명성에도 불구하고 총학생회도 포기해 버렸는지 이제는 입을 다물어 버렸네요. 한 학우는 인트라넷에 댓글을 올렸다는 이유만으로 학생과에 호출을 받았답니다. 어떤 한 학우는 호출될 것이 두려워 공개적으로는 말 하지 못하겠다며, 자신이 개인적인 경로를 통해 알게 된 사실들을 저에게 쪽지로 보내줍니다.
우리는 변하지 않았습니다. 참으로 슬프게도, 아직도 ‘내 사랑 한동’이 현재 지금의 한동에 유의미한 이유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