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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짓의 사람들 M. 스콧 펙 지음, 윤종석 옮김/비전과리더십 |
이 책을 오래전부터 읽고 싶다고 생각 했었는데, 반양장본이 절판되고 양장본으로 개정되어 나온다는 소식을 듣고 시내 서점으로 달려가 재빨리 사두었다. 책의 내용은 변함 없음에도 양장본으로 변화하게 되면 책값만 비싸지는 단점이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내가 가지고 있는 책은 양장본이 아니라 반양장본이다.
스캇 펙의 책은 다른 사람에게 권하기에도 참 좋은 책이다. 보통 읽기 쉬운 책은 책의 질이 너무 떨어지거나, 책의 질이 좋은 책은 읽기가 너무 어렵다. 스캇 펙의 거짓의 사람들은 그 내용이 그렇게 어렵지는 않지만, 인간 이해에 관한 많은 논점들이 아우러져 있어서 읽을만 하다.
선악판단 그 자체에 대한 옹호
악에 대해서 서술한다는 것은 어떠한 것이 악이라는 판단을 한다는 것이다. 스캇 펙 박사는 기독교인이고, 스스로가 책을 적을때 그러한 관점이 옳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러한 시각을 가감없이 나타내고 있다. 그런데, 흔히 기독교인들이 어떠한 비판에 대해서 “비판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비판하지 말라”는 말을 인용하며, 비판 그 자체를 부정하는 걸 볼수 있는데, 스캇 펙 박사가 보기에 이는 잘못된 성서해석이다. 따지고 보면, 예수야 말로 엄청난 시대의 비판자는 아니었던가?
‘누구 누구는 악하다’고 딱지 붙일 때 나는 이미 그를 판단하고 있는 것이며 그것도 아주 딱 부러지게 비판적으로 가치 판단을 하고 있는 것이다. 나의 주님은 “비판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비판하지 말라”고 말씀하셨다. 이 말은 문맥과 상관없이 너무 자주 인용되고 있다. 여기서 예수님이 말씀하시려고 했던 것은 우리가 절대로 이웃을 판단해서는 안 된다는 의미는 아니었다. 바로 다음 구절을 보면 알 수 있다. “외식하는 자여 먼저 네 눈 속에서 들보를 빼라 그 후에야 밝히 보고 형제의 눈 속에서 티를 빼리라.” 그러니까 예수님은 다른 사람을 판단할 때는 아주 조심스럽게 해야 하고, 그 조심은 바로 자신을 살피는 일에서 시작됨을 말씀하셨던 것이다. (스캇 펙,[[거짓의 사람들]] (서울: 비전과 리더쉽,2003), 윤종석 역, 10.)
긴장
무엇보다 이 책의 미덕은 하나만을 고집해서 주장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가령 ‘악’의 연구에 있어서 과학적 방법의 필요성을 역설하다가도, 도덕적 판단의 위험성이나 과학밑에 도덕을 둘 경우의 위험성 같은 것을 언급해주는 절제의 경우나, 악의 규정에 있어서 ‘선의 결핍이 악이다.’는 종래의 플라톤, 어거스틴류의 주장에 반대하여 악의 실존성을 인정하면서도, 악은 어떤 미성숙한 것이기도 하다는 것을 인정한다. 그리고, 사랑해야 한다는 당위를 주장하면서 그 내용 속에 ‘수용’하는 사랑, ‘거부’하는 사랑을 언급하여 실천적 측면에서는 긴장상황을 유지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그래서, 이 책 속에 어떤 논리적 비일관성이 발견될지도 모르겠다.
스캇 펙 박사는 그의 전작 [[아직도 가야할 길]]에서 ‘게으름’에 대해서 이야기 했다면, 이번 [[거짓의 사람들]]에서는 ‘교만’에 대해서 이야기 한다. 교만을 나르시시즘과 연관시켜서 이야기 하는데, 나르시시즘은 자신의 자아상을 집요하게 지키고 반성이 부족한 것을 말한다. 때문에 나르시시즘에 대한 경계로 자기자신을 끝없이 반성할 것을 강조하면서도, 또한 너무 과도한 반성도 ‘죄를 짓는’것이라고 말한다. 어쩌면 ‘너무 과도한 반성’이 신경증의 시작일지도 모르겠다.
죄에 대한 기독교 교리가 너무 자주 악한 뜻으로 오용되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래도 기독교 교리의 가장 큰 매력은 그것이 죄 문제에 대하여 포괄적으로 타당하게 접근한다는 사실이다. 그 접근에는 양면성이 있다. ..(중략).. 기독교 교리가 강조하는 또 다른 한 측면은 우리의 죄가 용서되었다는 사실이다. ..(중략).. 그러므로 이제 바른 정신을 가진 기독교 교회가 강조하게 되는 또 하나의 사실은 우리 자신이 지은 사소한 죄들 하나하나에 끊임없이 착념하는 것이 그 자체로서 죄라는 점이다. 자신의 작은 죄에 착념하는 것을 ‘지나친 내성(內省)’이라고 부른다. 하나님이 용서하신 우리를 우리가 용서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자신을 하나님보다 더 높은 위치에 두는 행위이며, 바로 다른 모습으로 가장하고 있는 교만의 죄를 범하는 행위다. (92.)
집단 악
스캇 펙 박사는 ‘악’하다고 판명되어지는 사람들의 대부분이 ‘악’한 것이 아니며, 깊히 들여다 보았을때 실상 다른 악한 사람의 피해자인 경우가 많다고 말한다. 이러한 개개인의 경우에서 볼수 있는 인간들의 관계에 대해서 논하는 한편, 또한 인간들의 거대한 모임 ‘집단 악’에 대해서 언급한다. 스캇 펙이 보기에 “집단은 개인과 아주 비슷한 방식으로 행동하는 경향”이 있지만, “집단이 개인보다 훤씬 더 원시적이고 미성숙할 수 있다”고 말한다. 그는 심리학적으로 “왜 집단은 부분의 총합보다 항상 뒤떨어지는”지에 대해 모두 설명해 낼 수는 없지만, 그러한 요인들 중 하나가 ‘전문화’라고 주장한다. 우리 시대의 많은 악들이 ‘전문화’와 관련되어 있다는 것이다.
집단 내 개인들의 역할이 전문화될수록 개인이 도덕적 책임을 집단의 다른 부분에 전가시키는 일은 가능해지며 쉬워진다. 이 과정에서 개인이 자신의 양심을 버리는 것은 물론 집단 전체의 양심도 너무 분해되고 희석되어서 아예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될 수 있다. 우리는 앞으로 이 양심분해에 대한 이야기를 여러 다양한 방식으로 계속 언급할 것이다. 이 문제에 있어서 한 가지 틀림없는 사실은 다음과 같다. 즉 모든 개개인이 자신을 자기가 속한 집단의 행동에 직접 책임이 있는 자로 인식할 때까지는 어떤 집단이라도 불가피하게 잠재적인 무양심과 악의 상태에 빠져 있을 수 있게 된다는 점이다. (294.)
권위자가 자신의 일을 하는 것에 대하여, ‘그 사람이 알아서 하겠지.’라는 태도는 언뜻 신뢰를 바탕으로 한 미덕있는 행동으로 보여진다. 하지만, 전문가에 대한 맹목적 신뢰는 ‘악’의 시작이 될 수 있다. 스스로가 과학자가 되는것, 스캇 펙 박사가 우리에게 요구하고 싶은 것이다.
이어서 새로운 집단의 대표자 선출 과정이 합리적이라기 보다는 ‘무의식’적으로 자연스럽게 일어나는 것을 지적하며, 이러한 대표선출의 과정에는 타인에게 의존하고자 하는 의존성이 바탕에 있음을 지적한다.
그러나 보다 근본적인 이유는 그 정반대다. 즉 대부분의 사람들은 지도하기보다는 따르기를 원한다는 사실이다. 여러 설명이 가능하겠지만 대개는 게으름의 문제다. 지도자가 아닌 추종자가 된다는 것은 훨씬 더 쉬운 일이다. 추종자에게는 복잡스런 결정, 장래 계획, 주도권 행사, 배척당할 위험, 용기의 구사 등을 겪어야 할 필요가 전혀 없다. (300.)
이러한 의존성은 우리가 경계해야 할 대상인 것이다. 이러한 생각을 바탕으로, 스캇 펙은 “이상적인 성숙한 치료 집단은 모두 지도자들로 구성된 집단이라고 할 수 있다.”(301.)라고 말하는데, 스캇 펙에게 있어서 이상적 정체(政體)는 직접 민주주의라고 볼 수 있겠지만, 현실에 있어서 사회가 의회 민주주의로 진행될 수 밖에 없는 이유를 심리학적으로 설명해 내었다고 할 수 있지는 않을까.
나르시시즘의 작동
집단은 ‘집단 응집성’을 가지기 때문에 개개 멤버들이 하나로 묶여 작동한다. 이러한 응집성이 없다면, 그 집단이 분해되고 더 이상 집단일 수 없다. 이러한 집단을 유지하기 위한 가장 강한 응집력 중의 하나가 나르시시즘이라고 펙 박사는 언급한다. 이러한 “집단 나르시시즘의 실제적이고도 보편적인 유형은 ‘적 만들기’ 또는 ‘비회원에 대한 적대감’ 이라 할 수 있다.”(302.) 건강한 집단의 경우 실패는 성찰과 비판의 계기가 되지만, 악한 집단은 집단에 대한 비판을 견딜 수 없기 때문에 “예나 지금이나 집단 지도자들에게는 실패의 시절이 오면 다른 나라 사람이나 ‘적’을 향한 집단의 증오심을 한층 끌어올림으로써 집단 응집력을 강화하려는 것이 기본이다.”(304.)
이러한 집단 나르시시즘은 그 집단에 속하는 사람들에게만 해당하는 이야기가 아니다. 집단에 속할 사람을 뽑는 과정에서도 무수한 개입이 있다.
많은 단계들을 거칠 때마다 나는 그 ‘클럽’의 멤버가 될 만한 자질들을 갖추고 있는가에 대하여 검사를 받았던 셈이다. 어떤 전문 집단이든 다 따지고 보면 자신의 선택과 집단의 선택의 공동 결과로 생겨나는 특별한 분야라 할 수 있다. (305.)
펙 박사의 이같은 언급은, 집단 내부에서의 이야기 되는 ‘객관’ 이라는 것이 얼마나 부질없는 것일 수도 있음을 시사해 주고 있다.
국가 전체의 나르시시즘은 때때로 정상적인 한계를 넘어서는 수가 있다. 그렇게 되면 국가는 증거에 비춰 입장을 재조정하는 것이 아니라 그 증거를 말살해 버려리는 시도를 하게 된다. (322.)
징병제 그리고 모병제
펙 박사는 이제껏 악을 유발시키는 ‘전문화’와 ‘집단’의 나르시시즘에 대해서 언급했다. 그러한, ‘전문화’ + ‘집단’의 가장 대표적인 예가 군이다. 스캇 펙 박사는 이러한 전문화에 대항하기 위해서 징병제가 필요하다고 언급한다.
징집제야말로 군을 건강하게 지킬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다. 그게 아니라면 군은 필연적으로 기능 면에서 전문화가 될 뿐만 아니라 심리 면에서도 점점 더 전문화가 되어갈 것이다. 신선한 공기는 완전히 차단될 것이다. 그것은 계속해서 기존의 자기 가치관을 강화시켜 점점 자기 우물에 갇히게 될 것이고, 그러다가 다시 한 번 고삐가 풀어지는 날이면 베트남에서와 똑같이 피에 굶주려 날뛰게 될 것이다. 징병제는 고통이 뒤따르는 제도이다. 그러나 그것은 보험료 지불과 다를 바 없다. 징집 복무야말로 우리 군의 ‘왼손’을 건강하게 지켜 주는 유일한 방법이다. 만약 우리에게 군이라는 것이 있어야만 한다면 그것은 어떻게든 피해를 입히게끔 되어 있다. 한 국민으로서 우리는 대중 파괴의 수단을 갖고 놀아서는 안 된다. 그 수단을 사용하는 것에 대하여 개인적으로 책임을 분담하려는 생각은 조금도 없으면서 말이다. 우리는 우리 대신 그 더러운 일을 수행해 줄 고용 살상자들을 뽑아 훈련시킨 뒤 그들이 무슨 피를 어떻게 흘리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잊어버리고 마는, 그런 입장을 취해서는 안 된다. 우리가 누군가를 죽여야 한다면 우리는 떳떳하게 우리 자신을 개입시켜 그 고통을 감수해 내야 하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자신을 스스로의 행동으로부터 절연시키게 될 것이고, 그렇게 되면 한 국민으로서 우리는 지금까지 여기서 쭉 얘기해 왔던 그 개인들과 똑같은 존재, 즉 악한 존재가 되고 말 것이다. 악이란 자신의 죄악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데서 비롯되는 까닭에서다. (311-312.)
우리 사회에 군이라는 조직이 있어야만 한다면 나는 우리 사회가 그 조직을 가능한 한 최고의 수준까지 탈전문화시키는 일을 심각히 고려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몇 가지 과거의 개념들 즉 보편 병역 및 의무 병역 군대가 있으면 전시에는 지금의 군처럼 군사적인 기능을 감당하지만, 한편 보통 때에는 슬럼가 정비나 환경 오염 예방이나 직업 훈련 교육이나 다른 요긴한 대민 활동 등의 평화적 기능에 전적으로 유용하게 기용할 수 있다. 전원 지원제나 모종의 불균등한 징병제 대신에 이 제도는 남녀를 불문하고 모든 미국의 젊은이들에게 의무적으로 부과되는 국가 방위 체계가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되면 총알받이로 징집되는 일은 없어질 것이며, 오히려 아주 다양한 요긴한 과업들을 위해 골고루 기용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모든 청년 복무 의무화는 즉각적으로 그리고 동시에 군의 모험주의를 절제시켜 줄 뿐만 아니라 필요할 때 전면적인 동원도 한결 쉬울 것이다. 보통 때에도 중요시된다면 징집병들은 그렇게 전시가 되기를 갈망하지 않게 될 것이다. 이런 안이 너무 광범위해 보일지는 몰라도 본질적으로 실행 불가능할 면들은 하나도 없다. (318.)
징병제를 반대하고 모병제를 옹호하는 사람들이 한번쯤은 생각해 볼 만한 이야기 인 듯 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