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론과 교육은 사라지고 정치적 배제와 폭력만 남았다.

졸업생이 뭐 이리 글을 많이 쓰나. 학생지도위에서 대자보를 자꾸 땐다고 하길래 글 하나 또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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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론과 교육은 사라지고 정치적 배제와 폭력만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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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 얼마 전 경희대에서는 어떤 한 강사가, 마르크스의 사상을 강의했다는 이유로 국정원에 신고를 당했습니다. 신고한 사람은 다름이 아니라 그 강사의 수업을 듣는 학생이었습니다. 당시에는 소위 ‘이석기 사태’가 터진 시점이라, 언론에서는 이를 이념대립이 고조된 상황이 대학캠퍼스에까지 영향을 끼친 것으로 해석했습니다. 하지만, 그 이전에도 한동대학교에서는 비슷한 사태가 있었습니다. 정부의 정책을 비판했다는 이유로 한 교수가 징계를 받을뻔한 사건이 있었습니다. 경희대 사건의 경우에는 학생이 강사의 수업 내용을 국정원에 신고했지만, 한동대학교의 경우에는 교수의 수업 내용을 학부모에게 신고했습니다.

대학이 지성의 전당이라면, 정치적 사안에 대한 이야기에 있어서도 학생과 교수 사이에 논쟁이 가능해야 합니다. 우리가 소위 말하는 ‘지성의 전당’으로서의 대학은, 지식의 최전선이며 온갖 가능한 편파성이나 당파성들이 들끓는 곳이어야 합니다. 특정 학파가 편중되어 있는 전통으로 유명한 외국의 유수 대학들은, 대학에서는 편파성이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중요한 것은 이러한 이론들이 서로 대결하며 토론이 가능해야 하겠지요.

하지만 이제 대학에서 논쟁을 기대하기는 어렵습니다. 학생들은 교수에게 질문하고, 대결하지 않습니다. 자신의 마음에 들지 않는 교수가 있으면 제거해 버릴 뿐입니다. 학점을 잘 주는 수업을 들을 뿐이고, 학점을 잘 주지 않거나 자신의 마음에 들지 않으면 강의평가에서 낮은 점수를 주면 됩니다. 그마저도 안 된다면 학부모를 통해 교수를 징계내리거나 국정원에 신고하여 그 강사의 존립근거를 제거해 버리면 됩니다. 이런 태도는 학생이 교수를 대하는 태도에 국한된 것이 아닙니다. 학생들 또한 교내에 붙은 대자보가 마음에 들지 않을 때, 자신의 의견으로 논박하는 것이 아니라, 대자보를 떼어 버립니다. 총학생회의 대자보가 학생의 손에 떼어진 것처럼, 학생들 또한 자기와 마음에 들지 않는 의견을 틀어막는 폭력을 버젓이 행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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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태도들은 일면 자신이 굉장히 순수하고 비정치적인 듯 가장합니다. 하지만 정치적인 것을 경계하고 정치에 냉소하는 이들의 실천이야말로 가장 정치적인 행위입니다. 우리는 그런 태도를 ‘김미영 사태’ 때 이미 경험한 바 있습니다. 그들도 그들 자신의 입장에서야 자신의 행위가 비정치적이며 신앙적 행위를 했을 뿐입니다. 그리고 그런 태도를 지금 학생지도위원회의 대자보 거부에서 또 다시 보고 있네요. 학생처장은 ‘저희는 총장님의 답변을 듣고 싶습니다.’라는 대자보가 서명을 받는 공란이 있어 정치적 의도로 비춰질 여지가 있다는 비평을 합니다. 하지만 학생지도위원회의 판단은 보다 더 노골적으로 정치적입니다. 총장의 답변글이 공지가 되었으므로 그 대자보는 허가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여러분들이 익히 아시는 것처럼, 해당 편지글은 명예총장에 대한 한 가지 대답으로 국한됩니다. 여러 질문들이 있었는데 한 가지 대답만으로 충분하다는 판단은 학생지도위원회가 총장 감싸기에 혈안이 되어 있다는 정치적 의도로 읽힐 가능성이 농후합니다. 이미 내용에 대한 검토가 정도를 넘어 사전검열이라 할만함에도 학생처장은 상업광고와 이단을 막기 위한 최소한의 조처라고 강변하고 있네요. 그래서, 제가 궁금한 것은, 학생들의 대자보가 이단이기라도 했으며 상업적 홍보물이기라도 했나요? 모든 법 규정은 그것이 애초에 목적한 바에 맞게 적정한 수준으로 집행되어야 합니다. 학생지도위원회의 대자보 불허는 규정의 목적에서 벗어난 남용으로 보입니다. 특히나 헌법이 보장하는 언론 출판의 자유를 제한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학칙이 헌법보다 소중한 것이 기라도 하단 말인가요? 저는 학생처장이 이단과 상업적 홍보물을 위한 최소한의 규정이라고 강변하는 것이, 그들에게는 대자보를 쓰는 학생들이, 대화와 소통으로 가르쳐야 할 학생들이 아니라, 오히려 한동에서 멸절시켜야 할 이단처럼 보이고 있다는 의미로 해석됩니다. 너무 과하고 악의적인 해석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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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론과 교육이 아닌 정치적 배제와 폭력의 방법은 신앙교육에서도 마찬가지인 것처럼 보입니다. 학생처장은 학생간행물 발간규정이 생기게 된 배경으로 신천지의 등장을 이야기 합니다. 하지만 저는 이러한 규정이 오히려 한동대 신앙교육의 실패로 보입니다. 한동대에서 쉽게 하는 수사로, 믿음으로 무장하면 이단에 흔들릴 일이 없겠습니다. 한동대 교목실은 신천지가 왜 나쁜지 잘 가르치고 있습니까? 한동대 학생들이 신천지의 실체를 잘 알고, 그 유해성에 대해 설명할 수 있고 자기 신앙에 확신이 있다면, 신천지라는 종교집단의 발화 자체를 막을 것이 아니라, 그들 스스로가 신천지라는 것을 부끄럽게 만들 수 있습니다. 특히나 한동대 학생들은 학교에만 갇혀 살 것이 아니라, 앞으로 사회에 나가면 신천지를 많이 마주하게 될 것입니다.

저는 지금 학교에 있지 않아 신앙교육이 어떻게 이루어지는지 판단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이것을 판단하는 방법은 스스로에게 몇 가지 질문을 던져보면 충분하리라 생각합니다. 지금 이 글을 읽는 당신은 신천지가 왜 나쁜 것인지 ‘이단’이라는 용어를 쓰지 않고 설명할 수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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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경희대와 한동대에 있었던 사건을 이념대립의 결과로 보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 이면에는 우리 사회에 만연한 정치에 대한 냉소가 작동한 결과라고 생각합니다. 정치라는 것은 나쁜 것인가요? 고대 그리스에서는 정치에 관심이 없는 사람을 얼간이라고 부르며 무시했습니다. 공자는 ‘정치는 바르게 하는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저는 정치인들에게 냉소할지언정 정치에 냉소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공동체의 정의를 포기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우리 공동체의 정치적 사안에 대해서 토론할 장소를 찾지 못합니다. 정치적 의도로 비춰질 수 있기 때문에 우리의 목소리는 틀어 막힙니다. 그래서 우리는 정치를, 또 토론을 ‘일베’에서 배웁니다. 당신들이 규정이 없고, 어쩔 수 없기에 내버려 두며, 또 경멸하는 그 ‘일베’에서 말이지요. 그런데 참 그들은 당신들을 닮았습니다. 공동체의 올바름을 고민하는 이들을 ‘씹선비’라 칭하며 조롱할 뿐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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