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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누군가를 비판했는데, 그가 그 비판을 시원스레 수긍하는 것은 썩 유쾌한 일이 아니다. 그는 그 시원스러운 태도 덕분으로 타인의 비판을 잘 수용하는 너그러운 인간이 될 수는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가 그 비판을 받아들여 변화했는지를 보면 대게는 그 비판이 실패했다는 것을 확인하게 된다.

인간의 존재가 변화하는 계기는 대게는 커다란 내적 동요. 즉, 상처라고 불리는 경험일 것이다. 어떤 사실을 받아들이기 싫어 몸부림치면서 그 과정을 통해 존재가 변화하여, 받아들이기 싫은 사실도 받아들이게 될 것이다. 존재의 변화가 진정한 의사소통인 한에야, 오히려 비판 대상자들에게 올바르게 기대할 것은 나의 비판에 대해 철저하게 배타적 태도를 취하는 것이 아닐까 싶기도 하다. 진정한 소통을 욕망하기에 누군가에게 상처를 주고 싶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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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 제대 후 1년 덜 되는 지난 기간 동안, 큰일들이 너무 많이 일어났다. 그런데 나를 돌아보면 그 사건의 크기에 비해 마음의 생채기는 비교적 크지 않은 듯하다. 나는 더 이상 예전처럼, 스스로를 괴롭히지 않는다. 아무리 스스로를 괴롭혀도 결과가 변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미 일어나 버린 일은 그냥 내버려 두는 것. 하지만, 그 내버려 둠이 앞으로 일어날 무엇에까지 연장되는 것은 아닐까 하는 의구심이 든다. 나는 일어난 일들에 무책임하고 무력했던 것 같다. 지금 나는 또 사람에게 무책임하며 무력하다. 앞으로도 무책임할까 혹은 무력할까. 아니면 이 무력함이 생채기일까.

감각, 감정들이 정지된 듯도 하다. 다른 이들이 느끼기로는 응당 슬퍼야 하고, 힘들어야 할 사건들에 나는 반응하지 않는 것 같다. 이제 그런 것들이 나에게 별것 아닌 일이 되어 버린 것인지, 아니면 그런 것들에 반응할 힘조차 없는 것인지 모르겠다. 내면이 없는 인간이 되어가는 것일까. 내 자신의 무던함이 너무 잔혹해 소름끼친다. 어쩌면 이미 상처받을 수 없는 인간이 된 것은 아닐까. 벌써 늙어버린 것은 아닐까. 더 이상 소통되지 않는 꽉 막힌 인간이 되어버린 것은 아닌가 하는 위기감이 든다.

달관하는 인간이고 싶지 않다. 큰 기쁨과 큰 슬픔을 요동치며 느끼고 싶다. 내 이웃과 환경에 반응하며 웃고 울고 싶다. 아무리 삶이 고되고 피곤해도, 상처받을 힘 정도는 남겨두고 싶다. 상처받는 사람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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