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찬국, 『들길의 사상가, 하이데거』(파주: 동녘, 2004)

들길의 사상가, 하이데거
박찬국 지음/동녘

I. 들어가며

  저자는 “모든 철학은 인간의 삶에 뿌리박고 있다. 그리고 인간이 역사적인 존재인 한 모든 철학은 자신의 시대와의 대결이다.”1)라고 책을 시작한다. 이런 시각에 기초하여 하이데거 역시 그의 철학이 그의 삶에 뿌리박고 있는 한에서, 그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의 철학과 생애를 함께 살펴보는 것이 필요하다.2)3) 저자는 하이데거의 철학 또한 하이데거가 살았던 시대와의 ‘대결’로 규정함으로써 하이데거가 대항 했던 사상적·시대적 전선을 보다 명확히 표현해 내고 있다.

II. 데카르트의 자연관과 플라톤의 존재이해

  하이데거가 살았고 하이데거 자신이 개념적으로 파악하려고 한 시대는 기술문명이 고도로 발달한 현대다. 하이데거의 철학은 기술문명과의 사상적 대결이다.4) 저자가 보기에 하이데거의 전선 중 가장 근본적인 지점은 과학기술과 이데올로기이다. 하이데거가 현대를 ‘고향 상실의 시대’라고 규정한 것도 과학기술과 이데올로기에 의해 인간이 착취 대상이 되는 것에 대한 대항적 맥락에서 나온 규정이다.

  먼저 과학기술주의가 기반하고 있는 근대의 데카르트적 주체와 종래 플라톤류의 전통 형이상학에 대한 반성작업을 언급한다. 데카르트의 자연관은 자연을 ‘수학적으로 계산 가능하고 예측할 수 있는’ 연장적 사물〔res extensa〕로서5) 보는데, 이는 인식하는 주체와 인식하는 대상을 분리하고, 그 둘 사이에 공통점은 없는 것으로 본다. 데카르트 자신은 자신의 철학적 작업이 “모든 물체의 힘과 작용에 대한 인식에 도달하는 철학을 발견하는 것”이며 “이러한 인식을 적합한 모든 목적을 위하여 사용할 수 있을 것이며 이러한 인식(표방하는 새로운 방식)을 통하여 우리는 자연의 지배자이자 소유자가 될 것이다.”6)라고 말하고 있다. 이는 근대가 진행되면서 세계를 계산 가능한 에너지들의 연관체계로 보는 자연관으로 심화되었으며7), 인간 자신도 자연에 속하는 이상, 필연적으로 인간마저 ‘객관적인 법칙에 의해 지배되는 계산 가능한 에너지’로 규정하는 결과에 이르게 되었다.8)

  이는 필연적으로 인간을 대상화하고 에너지를 뽑아낼 객체로 보게 된다. 이 같은 데카르트의 자연관의 문제점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자연을 보는 시각을 바꾸어야만 한다. 그리고 이것은 또한 인간의 이성에 대한 이해마저 바뀌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과학주의적인 이성관에서는 데카르트적 자연관을 전제로 자연을 대상화하면서 그 작용법칙을 냉철하게 파악하는 능력으로 이성을 규정한다. 하이데거는 이 같은 이성관이 데카르트를 비롯한 서구 형이상학의 존재자에 대한 이해에서 비롯하는 것으로 본다. 하이데거에 의하면 서구 형이상학은 ‘존재자가 존재한다’는 것의 의미를 ‘인간이 지각하거나 이론적으로 고찰할 수 있는 대상으로서 존재한다’는 것으로 이해해왔다.9) 이러한 존재 이해는 우리가 언제든지 이론적으로 파악할 수 있고 지배할 수 있는 대상으로 존재자를 간주한다.10)

III. 쇼비니즘과 자유민주주의국가에 대한 비관

  하이데거가 살았던 당시의 독일은 바이마르정권이 집권하던 시기였다. 당시 독일은 경제공황과 1차 대전의 패배에 따른 연합국의 배상요구 압박에 시달리고 있었는데,11) 당시 대부분의 국민들은 자유민주주의적인 바이마르 정권이 이 같은 난국을 수습할 수 있으리라고 믿지는 않았다. 하이데거 또한 이러한 생각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가 특별하게 우려한 것은 바이마르 정권의 무능으로 볼셰비즘과 같은 극좌세력이 대두하는 것을 염려하였다.

  하이데거는 과학기술주의와 서구 전통 형이상학이 그러한 것처럼, 볼셰비즘 역시 모든 사물을 기술적 부품으로 전락시키는 전체주의의 전형으로 보았다. 자연 뿐만 아니라 국민 전체를 국력 증대를 위한 총동원 체제로 보았다.12) 하지만, 자유주의적인 바이마르 체제 역시 하이데거가 보기에는 볼셰비즘과 다를 바가 없는 체제였다. 자유민주주의적인 바이마르 체제가 말하는 자유라는 것 또한, 마르크스가 이미 지적한 바 있듯이 노동자들이 자신의 노동력을 팔 자유에 지나지 않는 것이었다.13) 인간으로서의 품위를 상실하고 실질적으로 부르주아 계급의 금권 지배를 강화하는 바이마르 체제는 미국 자본주의의 길을 걷고 있다고 하이데거는 보았다. 하이데거는 러시아의 볼셰비즘과 미국의 자본주의 양자 모두를 ‘모든 존재자를 계산 가능하고 얼마든지 착취될 수 있는 에너지로 환원하려는 광기와 물질 만능주의에 의해 지배되는 나라’들로 보았다. 그리고 독일민족과 유럽이 이들에 의해 위협받고 있다고 느꼈다.14)

  이런 맥락에서, 하이데거는 ‘나치 운동’에 희망을 걸었다. 히틀러는 나치운동을 시작하는 당시에는 반유태인 정서와 세계정복의 야심을 숨긴 체 기술문명과 도시문명, 대부르주아 세력을 배격하고 농촌과 농민들의 정신을 이상화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는데, 기술문명에 대한 대안으로 농촌의 삶을 강조한 하이데거15)는 자신의 사상과 나치즘의 이념에서 사상적 유사성까지 발견하였다. 특히나 히틀러는 1933년 5월의 ‘평화연설’에서 “민족에 대한 자신의 무한한 사랑과 충성은 다른 민족들의 권리에 대한 존중을 포함한다.”라고 말하였을 때, 하이데거는 물론 미국 대통령 루스벨트마저도 히틀러의 출현을 열광적으로 환영했다.16)

  하이데거는 이렇게 ‘나치운동’에 열성적으로 참여하였는데, 하이데거는 대학생들로 하여금 노동에 참여하도록 하고, 대학의 문턱을 낮추고 노동자들에게 배울 기회를 제공하려고 하였다. 더불어 맹목적인 학문의 자유보다
조국에 대한 책임의식을 강조하였는데, 이는 하이데거의 총장 취임 연설17)과 대학신문에 기고한 글18)에서 잘 나타나 있다. 하이데거는 나치당의 인종 이데올로기와 제국주의 정책에는 찬동하지 않았으나 초기의 나치운동에 적극적인 하이데거의 태도는 많은 비판자들에 의해 나치와 동일시되었다. 이후, 나치당의 권력은 점차로 강해졌고, 나치당은 대학의 요직에 나치당과 가까운 사람들을 임명하도록 대학총장인 하이데거에게 압력을 넣었다. 이에 하이데거는 자신이 총장직을 사임할 것을 결정하였다.

  하이데거는 비록 나치당에 비판적인 입장을 가지고 있었으나, 초기 나치운동에 적극적으로 동조했었다는 오명을 업고 있었다. 그런 이유로 하이데거는 나치즘에 대해서도 반성적 작업을 행하게 되는데, 특히 니체와의 대결을 통해서 나치즘의 본질을 파악하려고 노력하였다. 그러한 작업을 통해, 하이데거는 나치즘 또한 기술적 전체주의의 대안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의 극단이라고 생각하게 된다.

IV. 존재와 근본기분 그리고 망각과 회피

  하이데거가 지적한 플라톤의 전통 형이상학이 갖고 있던 존재에 대한 태도는 이제 정말로 그 태도에 대해서 물어보아야 한다. 전통 형이상학이 가지고 있는 ‘명제’가 아니라, 명제나 질문이 물어지는 명제 발언자 혹은 질문자의 기분에 대해서 묻게 되는데, 하이데거 철학에서 ‘근본기분 〔Grundstimmung〕’이라는 개념이 등장하는 이유도 이 때문이다. 책에서 설명하고 있는 용어해설 부분을 보자.

  기분 Stimmng과 근본 기분 Grundstimmung

하이데거는 기분이 인간의 삶에서 갖는 심대한 의의를 드러낸 키에르케고르의 통찰을 계승하면서 그것을 현존재의 존재를 구성하는 본질적인 현상으로 보았다. 기분은 다른 존재자들로부터 고립된 주체의 내면적인 감정에 지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을 엄습하면서 우리 자신과 우리가 처해 있는 세계를 개시하는 힘이다. 불안이라든가 깊은 권태와 같은 기분은 내가 세계에 던져져 있다는 사실을 단적으로 드러내면서, 나에게는 나 자신의 존재가 문제 된다는 사실을 개시한다. 기분은 현존재가 세계-내-존재로서 세계 전체에 열려 있다는 데서 비롯되기 때문에, 본능에 의해 제한된 환경세계에 사로잡힌 동물은 고통을 느낄 수는 있어도 기분을 가질 수 없다.

  하이데거는 이러한 기분 중에서 우리 자신과 세계를 완전히 달리 드러내면서 우리를 결단에 직면케 하는 기분을 근본 기분이라고 하였다. 전통적인 철학은 존재에 대한 이해가 보편적인 이성을 통해서 주어지는 것으로 본 반면에, 하이데거는 우리 각자가 실존적으로 경험하는 이러한 근본 기분을 통해서 주어지는 것으로 보았다. _ 책, 280. (밑줄은 필자)

  하이데거는 우리의 모든 이해는 ‘기분지어진 이해’라고 말한다.19) 본래, 그리스인들의 사유에서는 ‘경이’라는 근본기분으로 존재자들이 엄습해 오는데, 플라톤에서부터 존재는 인간의 이성을 통해서 언제든지 파악될 수 있는 초월적인 이데아로서 ‘망각’되어 가고 있었으며, 데카르트는 ‘회의’라는 근본기분을 바탕하고 철학적 물음들을 제시한다는 것이다.20)

  여기에서 한 가지 강조해야 할 점은 하이데거는 존재의 대상적 성격뿐만이 아니라, 존재가 우리에게 다가오는 주체적 성격 또한 보았다는 점이다. 과학은 존재자가 눈앞에 이미 드러나 있을 것을 전제로 한다. 하지만, 하이데거는 존재 자체가 개현되는 사건으로 진입해야 한다고 보았다.

우리가 존재자의 진리를 근원적으로 개시하기 위해서는 형이상학이나 과학처럼 이미 드러난 존재자들을 실마리로 하여 파악된 그것들의 본질과 전체적인 질서로부터 존재자들을 다시 해석하는 것이 아니라, 존재 자체의 개현이 일어나는 사건으로 진입해야만 한다. 이러한 진입을 통해서만 존재자들은 자신들을 근원적으로 드러낸다. 이에 반해 형이상학이나 과학이 탐구의 실마리로 삼는 눈앞의 존재자들은 존재자들의 근원적 개시가 퇴락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이런 의미에서 하이데거는 전통 형이상학은 존재자의 개시를 위한 근본 전제가 되는 존재를 망각했다고 보며 이러한 망각이 극단에 이른 것이 현대의 과학기술이라고 보았다. 현대과학은 존재자의 개시를 위한 전제를 존재 자체의 개현에서 찾지 않고 인간이 기투하는 조작적인 가설에서 찾는다. _ 책, 281.

V. 예술과 철학의 관계

  과학주의적 입장에서 철학은 과학과 유사한 학문으로 취급되었다. 그런데, 하이데거에게는 철학은 예술과 유사성을 갖는다. 하이데거는 철학을 역사적으로 다가오는 존재의 진리가 근본기분을 통해서 개현하는 것으로 보았는데, 이러한 현상을 나타내는 개념이 하이데거의 ‘존재 역운’이다.21) 저자는 하이데거의 존재역운을 우리가 흔히 영감〔Inspiration〕이라고 부르는 것의 하이데거 특유의 해석으로 보는데,22) 하이데거는 진리가 우리에게 다가오는 것이라고 생각했음을 보여주는 표현들을 곳곳에서 드러낸다.23) 이렇게 보았을 때, 영감을 긍정하는 예술이야 말로, 진정 철학에 근접한 것이다. 하이데거는 예술작품의 본질은 ‘존재자의 진리를 작품 안에 정립하는 것’이라고 말하였다.24)

  이 책에서도 특별하게 관찰할 수 있는 부분은, 하이데거의 주저 『존재와 시간』을 톨스토이의 『이반 일리치의 죽음』에 빗대어 설명하는 부분이다. 이는 철학과 문학의 관계에 대한 저자 박찬국의 시각을 드러내는 부분이다. 저자는 『존재와 시간』과 『이반 일리치의 죽음』의 관계에 대해 아래와 같이 서술한다.

《존재와 시간》은 각자적인 현존재가 갖는 본질적인 존재 구조를 분석한 것이다. 하이데거는 인간 일반이 갖는 유형적인 특성에 대한 객관적인 분석이 아니라 각자의 개인이 어떻게 자신을 상실하고 어떻게 진정한 자신을 발견하는지, 그리고 일상속의 자기의 본질은 무엇이고 진정한 자기는 무엇인지를 분석한 것이다. …(중략)… 톨스토이가 이반 일리치라는 한 개인의 삶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문학적인 형식을 취한 반면에, 하이데거는 각자적인 개인으로서의 모든 인간이 갖는 보편적인 존재 구조를 분석한 것이 다를 뿐이다. _책, 77. (밑줄은 필자)

  하이데거의 예술
작품의 창작과 감상에 대한 태도도 특기할 만하다.

  하이데거는 작품을 창작하는 것 못지않게 작품을 감상하는 것도 존재의 진리를 생기하게 하는 근본적인 방식이라고 생각했다. 작품을 감상하는 것을 하이데거는 작품을 보존하는 것〔Verwahren〕이라고 말했다. 그것은 작품이 개시하는 존재의 진리 안에 진입하는 것이다. 그것은 작품을 주관적인 체험 안으로 끌어들이지도 않고 체험의 유발체로 만들지도 않으며, 작품 안에서 일어나는 진리에 진입하면서 세계와 자신을 새롭게 경험하는 것이다. _ 책, 239.

VI. 전쟁과 기술문명과의 관계

  하이데거가 살았던 시대는 전후의 독일이다. 과학기술문명에 대한 하이데거의 비판적 검토는 과학기술문명과 전쟁의 본질적 측면에 대한 통찰로 이어진다. 박찬국의 말하는 하이데거 사상의 의의 부분을 보자.

  기술문명은 우리에게 이익을 가져다주지만 전쟁은 해롭다고 사람들은 말한다. 그러나 전쟁과 과학기술문명의 급속한 발전 사이에는 아무런 연관이 없는가? 하이데거와 같은 사상가는 양자 간에는 본질적으로 연관이 있다고 말한다. 만약 둘 사이에 본질적인 연관이 존재한다면 우리는 기술문명을 깊이 반성하기도 전에 단순히 전쟁만을 중단하라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_ 책, 276.

VII. 마치며

  아무래도 하이데거 사상의 핵심적인 부분은 존재의 소리에 겸허히 귀를 기울이며, 그 속에서 신비를 발견하고 감사할 줄 알아야 한다는 생각인 것 같다. 존재자에게 진리를 뱉어내라는 공격적 태도가 아니라, 존재자가 무엇을 말하는지 듣고 진리가 우리 앞에서 개현하기를 기다리는 것이다. 그 진리의 개현을 회피하지 않고 마주 하라는 것이다.

  하이데거의 사상은 신비주의적 측면이 있는 것 같은데, 합리주의라는 것이 얼마나 사유를 좁게 만드는지에 대해서도 더 생각해 볼 필요가 있을 것 같다. 합리주의와 신비주의를 가르고 그것의 불명확성을 비판하는 기준 자체가 합리주의자의 그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도 해본다. 신비가 사라진 세상, 감사가 사라진 세상, 모든 것을 에너지로만 환원하는 세상, 하이데거가 안타까웠던 세상은 그런 것이 아니었을까? 하이데거가 보기에 지금은 또한 얼마나 안타까울까?


1) 책, 14.

2) “그러나 필자는 하이데거 사상의 형성에는 다른 여느 사상가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그의 가정환경이나 성장 배경, 그 시대의 사회적·정신적 상황 등이 큰 영향을 끼쳤다고 생각한다. 이런 의미에서 필자는 하이데거의 사상을 이해하는 데에서 그의 삶에 대한 검토가 상당 부분 기여할 것이라고 생각한다.”_책, 42.

3) 책, 39. 에서는 책의 전체적인 내용을 크게 세 부분으로 나누어 간략하게 설명하고 있는데, 시기별로 그의 생애와 사상을 다룬다고 요약한다.

4) 책, 15.

5) 책, 28.

6) 책, 29.에서는 《데카르트 전집》6권, 질송(Etienne Gilson)판, 1925, 61쪽 이하.를 인용하고 있는데, 이를 재인용 하였다.

7) 책, 29-30.

8) 책, 31.

9) 책, 33.

10) 책, 33.

11) 책, 158.

12) 책, 158.

13) 책, 159.

14) 책, 160.

15) 책의 곳곳에서는 하이데거의 사상이 농촌이었던 자신의 고향 메스키르히와 강한 연관성을 가지고 있음을 강조하는 부분을 발견할 수 있다. 가령 책, 45.에서는 “하이데거의 철학을 자신의 고향 메스키르히에 대한 연가이자 찬가라고도 부를 수 있을 듯하다. 하이데거는 황폐해져만 가는 기술문명에 대해서 자신의 고향 메스키르히를 대안으로 내세우고 있다.” 라고 말한다.

16) 책, 162.

17) 하이데거는 총장 취임 연설 ‘독일대학의 자기주장’에서 “그 동안 찬미되어온 ‘학문의 자유’는 대학에서 추방되어야 한다. 이러한 자유는 부정하는 자유에 지나지 않기 때문에 진정한 자유가 아니었다. 그것은 제멋대로 거리낌 없이 생각하고 행하는 것을 의미했다.” 라고 말함으로써 맹목적 자유에 대해 반대하는 태도를 보였다. 이는 책, 164. 참고.

18) <노동봉사로의 호소>라는 글에서는 “그러한 봉사를 통해서 대학생들은 자신들이 민족공동체에 뿌리를 박고 있으며 그것에 책임을 져야 한다는 것을 매일 분명하면서도 철저하게 경험할 것이다.”라고 말함으로써 민족공동체에 대한 책임의식을 강조한다. 이는 책, 164-165. 참고.

19) 책, 103.

20) 책, 214-216. 참고.

21) 책, 217-218. 참고.

22) 책, 218.

23) “우리가 사상을 갖게 되는 것이 아니라 사상이 우리에게 온다.” _ 책, 219. “그것이 내 안에서 사유한다. 나는 그것에 저항할 수 없다.”

24) 책, 2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