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길 총장이 울었단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은 그 울음에 감동한다. 김영길 총장은 참 많이도 운다. 아집대로 결정해놓고는 매번 채플에 나와 한마디 하고 들어간다. 학생들은 ‘총장님 마음고생 많으셨겠네’하며 별 말 않고 넘어간다. 반복되기도 너무 자주 반복되어 이제는 눈에 뻔하다. 자신에게 묻는다. ‘사실 이렇게 될 것 알았잖아. 김영길 총장이 한번은 울 것이라는 걸 알았잖아. 한번은 거쳐 갈 사건이고, 안 바뀔 걸 알았잖아. 사실은 가슴 깊이 냉소하고 있었잖아. 한동대 그 이름만 들어도 짜증부터 일었잖아. 그런데 왜 내가 이러고 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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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삐뚤어진 심성으로는 김영길 총장의 연설이 한 배우의 연극 같아 보인다. 적절한 타이밍에 눈물을 흘린다. 발언을 마무리 하고는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피날레.(카메라는 이를 알고 있었다는 듯이 줌 아웃 기법을 사용한다.) 그리고 얇은 웃음을 머금으며 단상에서 내려간다.
진정성이 느껴지는 눈물이란 무엇인지에 대한 질문을 던져본다. 진정한 눈물에 대해서 한번 생각해본다. 다른 사람들은 잘 모르겠지만 나는 그랬다. 정말 진심으로 오열할 정도로 눈물 흘리고 나면, 그 건에 관해서는 두 번 눈물 흘리기가 힘들었다. 진정한 눈물이라고 일컬을 만한 깊은 슬픔이 한 번 지나가면 말 그대로 ‘진이 빠졌다.’ 체력적으로 고갈될 뿐만 아니라, ‘진정한 눈물’을 흘리고 나면 심성상태도 바뀌는 듯 했다. 왜 그러한가? 진정한 눈물이라는 것은 두 번 나눠 흘릴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김영길 총장은 바로 그 ‘진정한 눈물’을 매번 두 번 이나 흘릴 줄 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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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길 총장은 채플 연설에서 사과를 했다. 사람들은 이를 보며 ‘진정성’을 운운하고, ‘소통’과 ‘겸손’등등, 그리고 ‘실천’을 운운하지만, 우리는 이를 통해 ‘진정성’과 ‘소통’과 ‘겸손’과 ‘실천’이라는 단어가 얼마나 오염된 단어인지 알 수 있을 뿐이다. 수많은 대통령들은 자신의 진심을 믿어 달라고 말했었고, 아직도 정치권에서는 소통이 중요하다고 말한다. 하지만 진심은 그들의 말 속에서 드러나는 것이 아니었고, 소통이라는 것은 그것이 가능한 조건을 따지지 않고서는 이루어지지 않는다.
사람이 어떻게 다른 사람의 ‘진정성’을 판단하는가? 그것은 그 사람의 말을 통해서일까? … 앎이 먼저인가? 의지가 먼저인가? 몸이 먼저인가? 마음이 먼저인가? 하는 주제들은 철학적 질문의 대상이 되었다. 하지만 그러한 문제를 고민하는 사람들의 대답은 ‘앎이라는 것은 실천으로 이어져야 진정으로 안다고 말할 수 있다는 것’ 혹은 ‘행동하고자 하는 의지가 실천을 만들며 그 속에서 앎이 생겨 난다’는 대답이었다. 또, ‘현실에 있어서야 몸이 행동하는 바에 마음이 결정되는 바가 많겠지만, 자신이 생각하고 결심하고 결국에는 그것으로 행동하는 것이 올바르다’는 대답이었다.
그런데 김영길 총장의 사과는 그러했나? 다른 사람들은 그의 사과에서 진정성을 느끼겠지만, 나는 그의 사과에서 위선을 본다. 사실 여기서 ‘사과’는 크게 중요하지 않다. ‘사랑 한다’는 말이 ‘사과’로 바뀌었을 뿐, 사람들이 바라보는 것은 그의 ‘눈물’이다. 그의 눈물은 항상 실천으로 행동으로 몸으로 드러나지 않았다. 이번에도 그러하다. 그는 한동대학교를 아주 떠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서로서로 아는 사람들로 자리를 채워 넣는 기막힌 한동대 리더쉽의 구성에 대해서 생각하면 이는 이해 못할 바도 아니다. 김영길 총장은 총장직에서 물러나지만 2014년 9월 20일까지 학교법인 한동대학교의 이사로 재직한다. 김영길 총장은 채플에서 자신이 후임자를 선출하는 방법을 만들어 놓지 못해서 미안하다고 말하지만, 그는 여전히 그 권한을 가지고 있다.
‘총장의 마지막 채플’에서 ‘총장선출 방법에 대한 미비’를 총장자신이 사과한다는 것의 함의가 무엇인지 고민해 보아야 한다. 이 사과는 법적으로는 총장 선출에 대한 권한, 그리고 정관개정의 권한이 이사들에게 있지만, 그 실세가 총장 자신 스스로였음을 자인하는 말이기도 하다. 학교의 일개 총장이 후임 총장을 정한다는 것은 기막힐 노릇이다. 그것은 그 절차를 정한다는 말에도 마찬가지로 적용된다. 따지고 보면 총장이라는 직분에 있는 자가 후임총장 선출에 관여할 책임은 없다. 이사회에 선출 권한이 있고 책임을 갖는데 총장이 무엇이라고 사과를 한단 말인가? 김영길 총장의 사과가 갖고 있는 함의는 사실 한동대 권력구조 정점에 자신이 있음을, 자신이 총장이자 이사이며 또 한동대의 재단이었음을 자인하는 말이기도 한 것이다.
마치 마지막인양 흘리는 눈물은 그래서 거짓이다. 그는 여전히 정관을 쥐고 있는 이사들 중의 한 사람이며, 아직 한동대학교 이사라는 직함으로 많은 영향력을 끼칠 수 있는 권력을 놓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직 그가 신임 이사장설에 대해서는 침묵하고 있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상기하자.
그는 소통과 절차의 미비에 대해 사과한다. 하지만 다른 이사들을 적극적으로 설득하지는 않는다. 학교법인에서 개최한 공청회에 나온 이사는 후임총장 선출에 관여하여 후보자들을 면담한 이사이기도 하다. 그 이사는 한 후보자에게 ‘왜 1인시위하는 졸업생을 말리지 않았냐?’고 질문했다고 한다. 공청회에 나와서는 학생들은 공부나 하라고 했다고 한다. 하나님 나라는 민주주의가 아니라고 말했다고 한다. 부모일에 애들은 신경 쓰지 말라고 했다고 한다. 이런 태도 속에서 무슨 ‘소통’이 가능한가? 그런데 참으로 공교로운 것은 이 이사가 공동대표로 속한 또 다른 단체의 이사장이 김영길이라는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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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한것은 없다. 그 눈물의 거짓된 점을 살펴보기보다 그 눈물이 호소하는 감성에 이끌리는 사람들. 김영길이라는 우상. 그 우상을 바라보며 두 손 들고 모인 사람들이 이 사람들 아니었던가. ‘하나님의 대학’이라는 허황된 구호에, ‘갈대상자’를 읽고 망상을 품고, 또 이제 ‘신트로피 드라마’를 읽고 한동대학교에 진학하는 이들이 어떤 이들일지는 자명하다. 그리고 그들이 그리는 한동대의 모습은 또 자명하다. 대자보를 붙이지 않는 전통 속에서 광장에 나와 기도만 하는 모습일 것이다. 불의 속에서도 감사의 습관을 발휘하는 이들. 이런 이들 속에서는 민주주의마저 무력해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