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청소년 친구들과 박병학의 ‘안녕하시냐고 묻지 마라’ http://www.newscham.net/news/view.php?board=news&nid=72404 를 보았다.
요약:
박병학은 세대론과 계급론을 대비시킨다. 세대론은 세대 내부의 계급적 차이를 간과한다고 비판한다. 박병학에게 세대론은 그저 팔아먹기위한 이빨까기일 뿐이다. 그래서 박병학은 20대 내부를 세분화 시켜 분석한다. 20대 내부에도 ‘책 끼고 다니며 술이나 처먹는 대학생’이 있는가 하면, ‘기계돌리며 쇳밥 먹는 젊은이들’, ‘밭 갈고 소 먹이는 젊은이’, ‘장애인’이 있다. 안녕하냐며 대자보 쓰는 젊은이들은 대학생 특권층이다. 그러니까 박병학이 보기에 그들이 특권을 내려놓고 대학을 자퇴할 생각이 아니라면 잠이나 자거나 토익책 보는것이 솔직하다.
청소년 친구의 반응:
이 글을 청소년 친구 중 하나는, ‘대학생’이 나으냐 ‘기계돌리는 젊은이’가 나으냐 되묻는다. 그의 시각에서는 언제 취직될지 모르고 학자금 빚만 떠안고 있는 대학생이 오히려 더 어려운 처지다. ‘기계돌리는 젊은이’는 차라리 노동시장에 편입되었으니 더 나은 처지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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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대운운은 박병학이 지적하는 것 처럼 90년대 소비주체를 호명하기 위해 시작된 것이 맞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박병학이 바라보는 것 처럼 노동과 소비의 대비가 그렇게 분명한 시대는 아니다. 사람들은 소비하기 위해 고용되어야 하지만, 차라리 인력을 감축하는 것이 자본가들 입장에서는 이득이다.
박병학은 20대 전체를 호명하는 것 자체가 세부적인 차이들을 무시한다고 계급론을 들먹이지만, 사실 안녕하십니까 대자보 사이의 세부적 차이들 또한 무시하고 있다. ‘나는 안녕하다’는 우파적 대자보가 있는가 하면, 성노동자를 지지하는 대자보도 있는 것이다.
그런데 근본적으로 강조되어야 할 부분은 말하는 것에 어떤 ‘자격’같은 것이 요구되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안녕하십니까’를 주도하는 무리들은 내가 보기에 이미 충분히 ‘집회를 찾아다니는 하이에나’들이며, 그것만으로도 이미 영웅적이다. 그런데 더욱더 영웅적이어야만 말할 자격을 갖는다는 것은 이미 폭력적이고 꼰대놀음이다. 철도파업을 두고 귀족노조 운운하는 것과 그렇게 다르지 않다. 말하는 것에 자격을 요구하는 이들은 좌파와 우파를 불문하고 꼰대취급하고 배척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