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말에 "개패듯 팬다."는 말이 있다. 아마도 그 표현이 지칭하는 대상은 대부분 집에서 살림하는 아내거나, 힘없는 자식새끼거나 그랬을 것이다. 성폭력 정당화 논리와 체벌을 정당화하는 논리가 유사한 이유는, 이 둘의 지위가 유사한 데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그 이전에는 아마도 개 맞듯 맞는 개가 있었을 것이다. 아내가 더 먼저 맞았다거나, 자식이 더 먼저 맞았다거나, 혹은 동시에 맞았다거나, 하는 여러 주장이 있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순전히 언어에 천착해서 생각해 보자면 개가 먼저 맞았을 것이 거의 확실하다. 개보다 아내가 먼저 맞았거나 자식새끼가 먼저 맞았거나 했다면, 개를 팰 때 "아내 패듯 팬다" "자식새끼 패듯 팬다" 라고 표현했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아내를 패거나, 자식새끼를 패거나 할 때 "개 패듯 팬다"라고 표현하니, 개가 먼저 맞고 있었을 가능성이 크다.
개는 말을 할 줄 몰랐고, 인간은 자신의 폭력성을 어찌할 수 없을 때, 말 못하고 힘없는, 그리고 가장 친근하기까지 한 개를 팼을 것이다. 그 옛말이라는 것이 한국의 옛말이라는 것을 생각해 볼 때, 적어도 한국에서 개의 위상이랄까 역할이랄까 기능이랄까 그런 것을 생각해 보자면, 아마도, 자연계까지는 아니더라도, 인간세계에서 표출되었을 지도 모를 폭력을 제 몸으로 받아 삭히며, 또 인간이 굶주릴 때 육보시까지 하였으니, 개의 인간사랑은 신에 버금간다 할 만하다. 그리고 감히 이러한 생각을 지구적으로 비약해 보자면, 인간의 폭력성을 받아주는 자연 존재들이 과거에 곳곳마다 있지는 않았을까 감히 짐작해 볼 뿐이다. 그 자연적 대상들이 꼭 폭력의 대상으로만 존재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정글북에 등장하는 모글리의 친구들이랄까, 아니면 숭배받는 인도의 코끼리랄까, 토테미즘의 대상들이랄까 그런 것들을 생각해 본다.
그런데 이제 개는 사라졌다. 정확하게 말하면 발에 채는 개는 사라졌다. 그리고 대초원을 거니는 코끼리는 사라졌다. 토테미즘은 미개한 종교로 치부되며 또 사라졌다. 자연은 도시화 문명화 되었기에, 대부분의 동물은 동물원으로 들어갔다. 우리는 동물에게 그들이 거처할 곳을 선택할 권리를 빼앗는 더 거대한 폭력을 행하고 있지만, 그 폭력은 직접적이기라기보다 간접적으로 변했고, 많은 동물은 멸종 위기에까지 처했지만 정작 우리의 폭력을 삭히는 역할을 해내지는 못하게 되었다.
그러니까 어쩌면, 과거의 그 시절에 매 맞는 아내나 자식새끼가 별로 눈에 띄지 않았거나, 공론의 장에서 이야기되지 않았던 것은, 어쩌면 흔히들 말하는 것처럼 과거에는 지금보다 여성주의나 아동의 권리 따위에 대한 인식들이 덜 깨어서가 아니라, 어쩌면 정말 어쩌면, 아주 조심스럽지만, 아내나 아동 대신 맞아주는 개 같은 것들이 있었기 때문은 아니었을까.
나는 누가 어떤 특정 대상을 때렸다는 것을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어쨌거나 어디로든 튈 수밖에 없는 우리 인간 폭력의 총량을 생각한다. 물론 그 자신도 시대의 아들이며 차별적 인식을 가지고 있다는 한계를 가지고는 있지만, 정신분석의 시초 프로이트가 근대를 해체하며 지적한 학문적 업적이라는 것은, 인간이라는 것은 그렇게 이성적 주체가 아니라 자신이 통제할 수 없는 무의식적 충동에 지배받는 존재임을 증명한 것이지 않은가?
나는 내 안에 괴물을 본다. 주기적으로 해소해야만 하는 내 안 폭력의 총량을 본다. 그래서 폭력의 선용을 생각해 볼 뿐이다. 그리고 이왕이면 나는 이 폭력이 거대한 폭력에 대한 저항으로 선용 되길 바란다. 나는 개개인이 통제할 수 없는 폭력성을 분출하는 일종의 출구랄까, 개개인이 생각하는 폭력의 선용이랄까 이러한 것들을 생각해 본다. 나와 비슷한 고민을 하는 누군가는 자신이 행위가 폭력의 선용이라 생각하며, 일베라던가, 동성애 혐오라던가, 또 아주 조심스럽지만 어쩌면 키배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 선용이 되지 않는다면, 그 폭력은 대상을 바꾸어 자신에게 향해, 자살이라던가 우울증이라던가 그러한 것들로 변화할 것이다.
나는 21세기에도 이런 일이 일어난다며 놀라기 보다, 인간폭력의 총량이 점점 더 커지고 있는 21세기 이기 때문에 일어나는 일들이라고 생각해 볼 뿐이다. 대상에만 천착한다면 남은 폭력의 총량은 또 다른 곳으로 향할지 모른다. 그러니까 잡설이 길었는데, 그런 맥락에서 무엇보다 폭력의 총량을 줄이려는 모든 시도를 적극 지지한다. 이러한 시도는 페미니즘에 국한되어 수행되는 것이 아닐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