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르크스의 저작을 2차저작 없이 꼴아박으며 읽는 세미나를 1년째 진행중이다.
지금은 자본1권을 읽고 있다. 아직 반도 못읽었다. 최근 읽은 부분은 영국에서 노동시간을 둘러싼 투쟁이다. 그런데 이 부분이 역사적 사실—모든 역사서술에는 관점이 녹아들어 있겠지만—이라기 보다 마르크스의 관점이 진하게 느껴진다.
자본론이 그리는 자본주의 초기의 실상이 잔혹하기에 자본론은 엄청 사실적이라는 감상이 가능하겠지만 —그 사실성이 엥겔스에서 온 것은 아닐까 하는 의혹을 가지고 엥겔스를 읽어보고 싶다. 아직 안읽었음 — 노동시간을 중심으로 투쟁이 서술되는 것은 좀 덜 사실적인것 같다. 그리고 이 반사실성이 마르크스가 정말 하고자 하는 말이 들어있는 부분이고 주목해야 하는 부분인 것 같다.
우리가 실제로 접하는 노동운동의 주류는(내가 과문한건가 우리나라만 그런건가…) 노동시간을 중심으로 한 투쟁이라기보다 임금투쟁이다. 당시에도 임금을 둘러싼 투쟁이 없었을리가 없다. 노동시간을 둘러싼 투쟁을 서술하는 과정에서 공황시기에 자본가들이 반격한다는 묘사가 있는데, 이때 노동자의 실상은 빚에 허덕이는 처지이다. 이때 노동자에게 필요한 것은 짧은 노동시간이라기 보다 많은 일거리와 많은 임금이다. 그리고 자본가는 이를 노리고 반격을 시도한다. 이런 시기에 노동자들이 노동시간만 중점으로 투쟁할리가 없다. 임금투쟁이 충분히 가능하고 충분히 있었을 것이라고 짐작해 볼 수 있다.
그런데 임금투쟁이 중심이 되면 그에 필요한 이론도 달라진다. 바로 ‘정당한 임금’에의 주장. 사람들은 이 정당한 임금에의 주장이 마르크스에 기반해 있다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은 것 같은데, 이 정당한 노동 임금을 주장하는 것은 마르크스 고유의 학적 의의라기 보기가 어렵다. 상품의 가치는 상품을 만드는 데 부여된 노동시간이라고 최초로 말한 것은 마르크스가 아니었다. 오히려 마르크스가 그토록 강하게 비판하는 부르주아 경제학자인 리카도이다. 그러니까 사실 임금투쟁의 이론적 근거로 필요한 것은 마르크스가 아닌 것이다.
그렇다면, 마르크스는 왜? 어쩌면 주류적 운동의 흐름이고 일상적이었을지도 모를 임금투쟁을 그의 책에서 지웠을까? 그런데 마르크스가 지우고 있는 것은 이뿐만이 아니다. 그에게 있어서 사기치거나 폭력을 행해서 잉여가치를 빼앗는—이건 빼앗는 것이지 마르크스가 주목하는 착취가 아니다—행위의 자본가는 그에게서 지워져 있다. 마르크스는 이런 부분에 대해서 언급할 가치를 못느낀다. 사실 마르크스가 지우고 있는 부분은 마르크스가 그렇게 싫어하는 도덕주의의 언술로도 충분히 비난할 수 있다.
마르크스는 어쩌면 폭력과 사기를 일삼는 자본가를 서술할 가치를 못느끼는 것처럼, 임금을 중심으로 한 투쟁을 서술할 가치를 못느끼고 있는 것은 아닐까? 현실에서 실재하더라도 마르크스가 탐구 중인 이론의 영역에서 서술할 가치를 못느끼는 것이다.
임금을 중심으로 한 투쟁은 그것이 이루어진 다음에 요구할 것이 없다. 자본가에게 잉여가치가 남지 않을 정도로 임금을 충분히 상승시키고 나면, 운동은 그다음에 무엇을 요구할 것인가?
그래서 사실 주목해야 할 부분은, 잉여가치가 노동에서 온다고 말하는 마르크스의 그 현란한 수식이 아닐지 모른다. 오히려 너무 쉽게 이해되어 얼핏 놓치기 쉬운 부분. 노동은 잉여가치를 만드는 것은 물론, 생산수단이 계속 살아있도록 유지하는 기능을 한다는 것. 사람의 손이 닿지 않으면 생산수단은 그 가치를 모두 잃어버릴지도 모른다는 것. 인간의 손이 만들어내는 생명을 부여하는 힘이 정말 주목해야 할 부분일지도 모른다. 이 부분을 주목하면 노동자는, 운동은 잉여가치를 넘어서는것을 요구할 수 있는 근거가 생긴다. 더욱더 급진적 요구가 가능한 근거가 생긴다.
이렇게 생각하다 보니, 어쩌면 마르크스 이론의 고유성. 인간이 살려내는 무형의 것을 주목하는 그 눈이 정말 주목해야 할 부분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사실은 도처에 널려 있는 그러한 기능을 하고 있는 우리네들의 삶에까지 생각이 미친다. 건물에 들어가 건물을 살리는 상인들의 노동이 떠오른다. 마을에 생명을 불어넣는 우리의 삶이 떠오른다. 그저 살아가는 것이 건물의 가치를 유지하고 높이며, 마을의 생명을 유지한다.
그래서 어쩌면, 그저 그곳에 계속 살게 해달라는 외침이나. 마음편히 장사하게 해달라는 외침이. 상인의 ‘권리금’을 적절하게 책정해달라는 요구나, 적정한 임금을 요구하는 운동보다 훨씬. 마르크스에 근접해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그들이 더욱 프롤레타리아에 근접해 있을지도 모르고. 하지만 마르크스는 또 그렇게 막연하게 휴머니즘적이고 낭만적으로 투쟁하지는 않았겠지. 그 과학적 이론적 근거를 찾았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