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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을 읽으면서 영화 매트릭스의 비유가 떠오릅니다. 네오가 만약 빨간약을 먹지 않고, 혹은 그 이전에 모피어스를 만나지 않았다면 어땠을까요? 네오가 비록 파란약을 먹고 매트릭스 세계 안에 살았더라도 매트릭스 세계의 허구를 전혀 발견할 수 없었을까요? 혹은 빨간약을 먹은 네오는 파란약을 먹고, 혹은 어떤 색의 약을 먹을지 선택할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은 채, 매트릭스 세계 안에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 매트릭스 세계의 허구를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요?
마르크스와 영화 매트릭스의 세계는 전혀 무관하게 여겨지지 않습니다. 매트릭스의 세계 속에서 그려지는 인간은 그저 기계의 먹이노릇을 하며 살아가지만 자신이 기계의 먹이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온전히 인지하지 못하고 살아갑니다. 기계가 만들어 낸 환상 속에서 주어진 것을 즐기며 살아가지요. 마르크스에게 있어서 자본주의 세계도 마찬가지 입니다. 자본가의 먹이로 대중들이 살아가지만, 대중들은 자본주의 세계의 물신적 성격, 그 환상으로 뒤덮여 있는 세계 속에서 주어진 것을 즐기며 살아가지요. 마르크스는 인간을 가축으로 묘사하기를 주저하지 않습니다.
마르크스가 말하는 물신주의는 마르크스가 설명하는 이 세상의 환상성을 바라보는 주요 키워드입니다. 마르크스는 그 환상이 환상이라는 것을 알지만 그 환상을 전제로 펼쳐지는 세계가 어떤 힘을 가지고 있으며 어떤 전개로 세계를 구성하는지 찬찬히 따라갑니다.
지난 세미나 시간에 다뤘던 내용도 그 환상성을 계속해서 상기하게 되더군요. 마르크스는 부르주아 경제학자들의 고전경제학의 길을 찬찬히 따라 가봅니다. 상품의 가치란 무엇인가? 또 노동이라는 상품의 가치는 무엇인가? 노동은 도대체 언제 생산되는가? 노동자의 생산비라는 것은 대체 무엇인가?
사실 우리는 마르크스가 이같은 질문에 이미 답을 주었다고 생각합니다. 상품의 가치란 그것에 소요되는 노동의 시간이고, 노동이라는 상품의 가치는 그것을 재생산하는 데 드는 비용이라는 것을요. 하지만 마르크스는 이 대답으로도 성에 차 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어쩌면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이 대답은 마르크스의 것이 아닐지도 모릅니다.
부르주아 경제학자들도 동일하게 던졌을 이 질문들은 사실 한가지를 놓치고 있습니다. 마르크스는 상품과 노동을 동일시했다고 지적합니다. 우리가 마르크스가 준 답이라고 생각하는 것 또한, 상품과 노동을 동일시하고 있지요. 마르크스는 고전파 경제학자들이 아무런 비판 없이 ‘노동의 가격’이라는 범주를 먼저 빌려오고 그 다음에 비로소 이 가격이 어떻게 결정되는지 의문을 던졌다고 지적합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기대하는 것은 이 ‘노동의 가격’ 혹은 ‘가치’라는 개념 혹은 범주에 대해 비판적으로 바라볼 것이 기대되겠지요. 하지만 마르크스는 그렇게 쉽게 답을 주지는 않는 것 같습니다. 오히려 부르주아 경제학자들의 환상을 적용시켜 끝까지 따라갑니다. [노동력의 가치 또는 가격의 임금으로의 전화]라는 챕터의 제목이 그러 한 것처럼, 노동력의 가치가 어떻게 임금으로 전화되는지, 그 전화되는 과정에서 어떤 왜곡이 일어나는지 찬찬히 살펴봅니다.
유랑학단 무지에서 같이 공부하는 달리는 [거대한 전환]에서 칼 폴라니가 노동은 애초에 상품처럼 작동할 수 없다고 말한바 있다고 말해줬는데요. 저는 어쩌면 마르크스가 궁극적으로 깨달은 바는 아마도 거의 비슷한 결론이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상품의 가격에서 무비판적으로 노동의 가격이라는 개념을 도출해 내는 것. 그것이 말하는 내용도 칼 폴라니가 말하는 것과 다르지 않을 것입니다. 마르크스도 어쩌면 노동은 상품이 될 수 없다고 말하고 싶을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마르크스는 이 결론을 빨리 말해주지는 않는 것 같습니다. 마르크스가 명시적으로 어떤 결론을 말해주기 전에는 아직 해석은 열린 것 같네요. 그리고 마르크스가 노리는 것 또한 독자가 이 결론을 재빨리 알기를 원하는 것 같지는 않습니다. 부르주아 경제학자들의 오류, 하지만 그 오류는 자본주의 세계를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오류일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그 오류를 기반으로 자본주의 세계는 구성되어 있지요. 이 오류 위에서 시간급이나 성과급같은 다양한 임금체계가 구성되겠지만, 마르크스는 이 환상을 자본주의 세계를 설명하는 기준으로 삼기도 합니다. [임금의 국가별 차이]에서 마르크스는 성과급만이 노동생산성과 노동의 내포적 크기를 측정할 수 있는 기준이기 때문에 성과급으로의 환산을 통해 임금의 국가별 차이를 설명합니다. 오히려 마르크스는 결론보다, 환상으로 구성된 세계 속에서 어떤 환상을 기반으로 사유하더라도 세상은 참으로 이상한 곳이라는 것을 독자들이 느끼길 바랬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마르크스는 세계의 본질을 보았을까요? 매트릭스의 비유처럼 빨간약을 먹은 사람일까요? 아직 빨간약을 먹지 못한 평범한 인간으로서 마르크스가 진정 빨간약을 먹은 사람인지는 알지 못하겠습니다. 다만 마르크스는 네오가 모피어스를 만나기 그 이전, 체제의 이상함에 눈뜨는 경험을 독자들에게 선물하고 싶어했던 것은 아닐까 짐작만 할 뿐입니다. 체제의 이상함에 눈 뜨는 순간 매트릭스의 요원들은 네오를 공격하기 시작하지요. 어쩌면 그 경험 이후에 살아남을 수만 있다면, 모피어스도 빨간약도 불필요한 것일지도 모르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