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은 문학의 힘에 대해서 하는 이야기들이 어느정도—아주아주 미약하게라도— 이해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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염세주의자가 사랑할 수 없다면, 박애주의자는 연애할 수 없다. 누군가 나에게 사랑이 무어냐 묻는다면, 나는 사랑하지 않음이 사랑함이라 대답할 것이다. —이렇게 말하면서 나는 나다운 대답이며 염세적이며 허무적인 대답이라고 속으로 생각하는 것이다.— 더 정확하게 말해서 사랑하지만 사랑하지 않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 사랑이리라고.
헤세가 자신의 수필에서 자신이 사랑하는 대상에게 해 줄 수 있는 것이 얼마 없음을 알고 보다 노숙한 정신적 염원, 멀리 떨어져서 행복을 기원하는 기도로만 남아있는 그런 사랑, 떨어져 있기에 넘치는 사랑으로써의 이상을 제시하고 있다면, 그래도 낭만주의자이자 자연주의자인 젊은 헤세는 이렇게 반문하곤 할 것이다.
“무엇인가를 구하러 산에 왔노라. 그러나 구하고자 하는 것은 자연에서가 아니었노라. 그것은 사람이었고 사랑이었노라. 초월한 신이 있다고 해서 그가 나에게 무엇을 할 수 있을건가. 아하. 인격적이고 내재적인 신은 없는가. 내 영혼과 육신을 어루만져 포옹할 수 있는 여인은 없는가.”
나는 그래서, 기도로 사랑을 염원하는 늙은 헤세에게, 떨어져 있기에 사랑하는 마음이 넘치기만 하는 헤세에게, 개인의 무능으로 기도나 하면서 우리는 정신적으로나 사랑할 수 있다면, 개인의 무능을 넘어선 인간의 무능은 무엇이냐고 한번 따져보고 싶은 심정이다. 인간은 사랑하기에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아니, 인간이 사랑하기에 할 수 있다고 여겨지는 것들이 실상은 결국에는 개인의 문제로 귀결되어야 함이 옳은 것은 아닐까? —아!! 사랑함에도 해결할 수 없는 절대고독이여!!— 개인의 문제를 사랑하는 주체가 해결해 주어 일종의 노예화를 초래함은 과연 올바른 것인가? 결국에는 자신의 문제를 자신이 해결 할 수 있도록 힘을 돋우워 주는 것이 사랑은 아닐까? 그렇다면, 우리의 위로는 무엇이 되어야 하며, 어떤 방식이 되어야 할까?
개인의 무능일 수도 있는 사안들을 일반화 시켜 나는 어떤 낭만을 옹호해 보고도 싶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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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츠비에게 있어서는 신도 없고 우정도 없다. —헤세의 수필에 나오는 식으로 말하자면 구원은 신-우정-여자 사이를 돌고 돈다.— 게츠비의 사랑은 염세주의자의 마지막 남은 불꽃과도 닮아있다. 그의 사랑이 염세주의자의 마지막 불꽃이라 말하는 이유는 별것 아니다. 그의 사랑은 데이지로 인해서 넘쳐 나가는 사랑이 아니었다. 그가 갖고 있는 우정—인간관계—은 모두 거짓이었고, 그 거짓은 데이지를 유혹하기 위한 공작새의 날개짓에 다름 아니다. 게츠비를 말하는 화자 ‘닉’은 게츠비의 장례식에 그 많던 사람들—게츠비의 파티에 참석하던—이 아무도 오지 않았다는 그 사실에 분개하지만, 실상 게츠비는 그런 것 따위는 신경조차 쓰지 않았을 것이다. 그의 인간관계는 모두 도구적이었으니까. 게츠비의 순수한 열망이 아무런 보상도 받지 못하고 데이지의—어쩌면 톰의— 정적(情敵)을 제거하기 위해 도구적으로 이용이 되었다는 것이 더 중요해 보인다.
닉은 그래서 뭐라고 말하는가? ‘하나의 꿈을 꾸는자의 비극적 결말’이라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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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 일종의 취향 이야기인데, 개인 내면의 혼란한 상황을 갈팡질팡하면서 서술하는 작품보다는, 내면의 어떤 갈등의 대척점에 있는 것을 형상화시켜 대립시키는 조금은 단순화 되면서도 정제된 작품들을 좋아하는 편이다. 가령 ‘클로저’를 예로 들면, 그 대립각이 선명해서 즐기기에 좋다. 대립이 갑작스레 사라지고 캐릭터의 개성이 갑작스레 사라지는 작품들은 아직도 나로선 ‘이게뭐야?’ 식의 반응이 나온다. 그런데, 약간은 예외적 성격을 가지고 이건 예술이다 싶은건 이인성의 소설들이다. 그 개인의 혼란 속에서도 나와 또 다른 나와 또 다른 나들의 이야기가 흐름이 있으니까.
이인성 하니까 생각나는데, 이인성의 <<한없이 낮은 숨결>>에 등장하는 ‘언어의 눈’은 무라카미 하루키의 ‘시점’을 연상시킨다. 하루키의 <<어둠의 저편>> 말미의 평론에서는 하루키의 ‘시점’이 작가의 가치판단을 배제함으로써 작가의 권위가 사라지고 평등주의적 서술이 어쩌고 시부렁을 늘어놓는데, 하루키의 ‘시점’이 영화의 카메라 에서 온 예술기법중의 하나라면, 차라리 솔직하게 ‘카메라의 권위’에 대해서 이야기 하는 것이 더 나았을 것이다. 나에게 이 말은 영화는 평등주의적이고 문학은 권위적이라고 말하는 것 같이 들린다. 이인성이 ‘언어의 눈’에 대해서 하는 이야기는 이런 잡스러운 평론더러 짜지라고 한다.
그 기법이 이인성이 먼저인지 하루키가 먼저인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한없이 낮은 숨결>>은 소설 주제가 소설짓기여서 좀… 짱이다. <<낯선 시간 속으로>>보다 짱인듯. 촘 짱 촘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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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언가에 발끈하며 진정한 감정을 보일 수 있다는 것은 행복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니까, 언젠가는 그 ‘발끈’함이 행복이었다고 생각할 때가 온다고 생각한다. 사람은 각자의 모습으로 사랑한다. 자기자신이 생각하는 혹은 하고있는 사랑의 모습이 이념형에는 들어맞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그 사랑에 대해 변호하고 옹호하고 수호하며 싸우고자 하는 의지가 있다면, 그것은 그 각자의 사랑이므로 존중하고 인정해야 할 것이다. 그는 사랑하고 있었다. 아주 행복하게. 스스로는 불행하다 여길지 모르겠지만, 행복했다고 생각할 때가 올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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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멸스러운자를경멸하지않아경멸받아마땅한인간으로서의당신을경멸한다또한당신을온전히경멸하지못하는나자신을경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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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즈음에 “나는 자유를 믿지 않는다.”는 글을 써보고 싶다. 거기에 “그래서 나는 억지나 부렸을 뿐이다.”를 붙일까 말까 고민중이다. 붙이면 뭔가 찌질하고, 없애자니 솔직하지 못한 글이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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습작 ///// 실재적 인물은 왜곡된 시각을 가지고 있다. 우리의 시점은 실재적 인물의 망막 위에 위치한다. 그렇기에 그 왜곡을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인다. 시점은 거울 앞에 있다. 얼굴이 보인다. 거울속의 얼굴은 반듯하게 비춰진다. 잠시간의 적막이 흐르고, 거울 가운데 선명한 선이 생긴다. 거울이 접히기 시작한다. 접히는 거울의 각도에 따라 인물의 상이 여러개 맺힌다. 거울은 얼마간의 운동을 반복하다 멈춘다. 상이 2개 맺혀있다. 시점 뒤의 실재적 인물, 그리고 반듯하게 맺혀진 얼굴상(像)과 또 하나의 상이 남아있다. 나머지 하나의 상은 심하게 일그러진 얼굴이다. 거울은 실재만을 비춘다. 실재가 거울을 통하면 반듯한 상이 되고, 또 한번 거치면 일그러진 상이 된다. 왜곡은 시각에서 이루어진다. 올바름과 일그러짐 사이에 실재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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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젊어서 좌절을 방탕하게 쾌락했나보다. 좌절의 효용이 듣지를 않는다. 나는 조금 더 늙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