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승진심사 관련한 소회

인간이라는 것이 홀로 존재하고 싶어도 그럴 수 없는지라, 그쪽동네 소식이 들려옵니다. 거기다 해당 교수님들이 저에게 각별한 스승이신지라 더 수이 소식이 들려오는 것 같습니다. 떠난 자가 말이 많은 것이 추해보였고, 그것 또한 그쪽 동네의 문제 중의 하나가 아닌가 하는 생각에 말을 아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럼에도 유령의 목소리가 만연한 이 공간에, 기록되지는 아니하고 흘러가기만 하는 이 공간에, 여기 또 흘러가버릴 유령의 목소리 하나쯤 더한다고 해서, 뭐가 그리 크게 달라지겠냐는 자기정당화에 체념을 더하며, 얄팍한 소회나 나눠봤으면 합니다.

김영길 총장이 말하는 위기, 그리고 그의 해법

여기에서 목소리를 내는 학우들의 우려와 김영길 총장이 가지고 있는 문제인식은 확연히 다릅니다. 많은 이들이 ‘위기’를 말하고 있지만, 그 ‘위기’가 같은 위기는 아니겠지요. 참으로 역설적이게도, ‘위기’에 대처하는 김영길 총장의 결단은 문제제기하는 자들의 눈에는 ‘위기’를 부채질하고 있는 꼴이니 말입니다.

김영길 총장이 가지고 있는 위기의식의 정체는 한동대학교의 정체성이 무너지는 거창한 위기가 아닙니다. “글로벌리더십전형을 신설하여 4년 전액 장학금을 제안했지만, 선정된 많은 학생이 결국 서울 소재 대학을 선택하”는 현실 속에서 “우리 대학이 입학 정원을 채우기에 급급한 지방 사립대학으로 전락”한다면, “비전이 무슨 소용”이냐는 김영길 총장의 말은, 김영길 총장의 위기의식의 정체가 한동대학교가 한국의 세인들에게 선택받지 못한다는 외부적 기준에 휘둘리고 있다는 것을 반영합니다.

그런데 역설적이게도 그 해결책은 우리의 ‘비전’이라는 서술이 잇따릅니다. 그렇다면 이 ‘비전’과 ‘정체성’의 정체는 뭘까요? 여기서 말하는 우리가 강화해야 할 정체성의 정체는 “한동에 소망을 품었던 학생들이 우리 대학으로 와야 할 이유”가 되는 정체성입니다. 우리의 정체성은 항상 우리가 정말로 ‘어떠해야 하는가?’하는 당위가 아니라 하나의 상품으로서 ‘어떻게 보여야 하는가?’에 달려있다는 사실을 인지해야 합니다.

객관적인 것에서의 패배, 그리고 정신승리, 그리고 또 그것의 객관화

한동대학교는 객관적인 측면에서 타 학교와 경쟁이 되지 않습니다. 재단이 없는 위기의 학교, 객관적 통계자료는 교수의 숫자도 적음을 보이고 있으며, 건물은 낡고, 지리상의 이점도 없는 학교가 자신을 교육서비스라는 시장에 학생들의 간택을 기다리는 재화로 내세웠을 때, 자신을 선택하도록 차별화 전략을 내세운다면 그것은 어떤 것이 될까요? 그것은 어쩔 수 없이 객관적인 물적 차원이 아니라, 정신적-추상적 차원에서 차별화 전략을 시도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것이 한동대학교가 제시하는 학문-신앙-인성의 통합적 교육이라는 차원입니다. 거기에 실험적 영어강의 전산수업 실무교육 등을 차별적 전략으로 내세웠었지만, 이제 너도나도 따라하고 있는 실정에서는 학문-신앙-인성의 통합적 교육이라는 추상적 차원만 남아 있을 뿐입니다.

이런 추상적 차원에서의 성과라는 것도 결국에는 한 측면은 지워질 수밖에 없습니다. 통계자료를 통해 충분히 비교할 수 있는 교수들의 논문 개제 횟수나 학문적 성과는 객관적 데이터를 통해서 경쟁력 없음이 입증되어 버립니다. 이 때문에 학교는 말합니다. “우리는 논문 수를 적게 요구한다.”라고 말입니다. 사실, ‘교육중심 대학’이라는 모토는 타 대학에 비해 경쟁력이 떨어지는 연구력을 감추기 위한 전략에 불과한 것입니다. 그래서 학교 측이 강조하는 것은 신앙교육과 인성교육이지, 학문교육은 아니게 됩니다. 거기에 ‘학문과 신앙의 통합’을 말하지만 학교측이 말하는 ‘학문과 신앙의 통합’의 귀결은 언제나 학문 없는 신앙입니다.

이 인성교육과 신앙교육은 또한 객관화 될 필요성이 제기됩니다. 무엇보다 우리 한동대학교는 교육시장에 내 놓아진 상품 중의 하나이니까요. 그러한 객관화를 위한 시도 중의 하나가 예전에 논란이 되었던 ‘교수의 채플 참석 강화’였습니다. — 좀 너무 오래 되었나요? — 그리고 이번 사건을 통해 총장이 시도하고 있는 것은 ‘목자 교수님’인 것 같습니다. 그럼에도 그 둘의 내용이 너무나도 동일하게 여겨지는 것은 저만의 착각일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때는 아마 감봉이 문제가 되었었던 것 같은데, 이제는 그 요건이 승진요건이 되었네요. 이번 사건을 새로운 사건으로 여기는 학우들도 있긴 합니다만, 한동대학교의 표면적 신앙에 집착하는 강박증은 그 전통이 오래 된 것입니다.

자율전공 그 제도의 태생적 문제점

우리학교가 취하고 있는 자율전공이라는 제도는 그 유연함 만큼이나 예측하기가 힘든 부분이 있습니다. 가령, 1학년 학우들이 전공을 선택할 때 한 학부로 편중되는 현상이 생기면 곤란한 부분이지요. 많은 학우들의 선택을 받은 학부 차원에서는 ‘교수 1인당 학생수’가 커지는 불리함이 있는가 하면, 학우들의 선택을 받지 못한 학부 차원에서는 몇 명의 학우를 위해 학부가 운영되는 재화의 불균형 현상이 초래됩니다. 물론, 자율전공이라는 제도가 학생 입장에서는 장점으로 부각될 수 있습니다. 하지만, 학생이 자율적으로 선택하는 만큼 그 예측불가능성을 넘어서는 그만큼의 돈이 요구됨은 엄연한 사실입니다.

거기에 외부적 브랜드인 ‘취업률’을 깎아먹는 학부라면, 학교측의 입장에서는 골칫거리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거기에 한국사회의 제도적 변화로 더 이상 시장성이 없는 학부의 경우에는 더더욱 골칫거리겠습니다. 이런 이유들과의 연관성 하에서 이미 사라진 교육과정이 있겠고, 앞으로 사라질 교육과정이 있을 것입니다. 이번에 정교수 승진이 불허된 교수님들이 해당하는 학부가 이에 해당한다는 생각을 저만 하는 것은 아니겠지요. 자율전공의 취약성을 해결할 수 없는 한동대학교의 한계는 결국 해당 학부를 하나하나 없애는 방향으로 문제해결을 도모하는 것 같습니다. 이는 결국 자율전공이라는 우리 학교의 차별적 제도가 얼마나 허구적인가를 보여주는 것이기도 합니다.

김영길 총장이라는 상징자본

김영길 총장이 장기 집권하는 것이 가능하게 하는 이유도 결국은 김영길 총장이라는 상징이 가지는 자본적 성격입니다. 김영애 사모의 <<갈대상자>>와 함께 기능하는 김영길 총장의 ‘스승의 날’사건은 김영길 총장이 계속해서 교회에서 간증할 수 있게 하며, 이를 통해 ‘후원금’을 끌어 올 수 있게 합니다. 김영길 총장이 총장직에서 물러난다 하더라도, ‘명예총장’같은 자리에서 계속해서 후원금을 끌어오는 기능을 할 수 있도록 하자는 등의 대안적 모델이 제시되는 이유도 김영길이라는 상징자본을 한동대학교가 버릴 수 없기 때문이겠습니다. 이는 재단이 없다는 한동대학교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해법으로 여겨져 왔었습니다. 이는 또 우리학교가 얼마나 후원자에게 의존하고 있는지를 말해줍니다. 이번에 언급된 ‘후원자의 항의’가 총장의 판단에 얼마만큼의 영향을 끼쳤는지는 우리학교가 그 후원자에게 얼마만큼이나 의존하고 있는가에 비례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학교에 후원할만한 후원집단의 정체가 무엇인지에 대해 생각해 본다는 것은 그렇게 어려운 일이 아닐 것입니다.

또 다른 ‘위기’를 말하며

저는 해당 교수님들이 전혀 걱정되지 않습니다. 이런 일 쯤은 쉽게 지나갈 수 있는 강직함과 어디 가서도 인정받을 수 있는 분들이라는 믿음 때문입니다. 다만 제가 걱정하는 것은 한동대학교라는 집단입니다. 지난학기에 있었다는 경경의 수업 문제와 이번학기에 있었다는 국제어문의 수업문제, 그리고 잇따른 이번 승진심사문제가 과연 한동대학교를 교수가 있고 싶어 하는 학교로 만들지, 있고 싶지 않은 학교로 만들지는 명확한 것 같습니다.

여기에서 문제제기를 하고 우려하시는 분들의 ‘위기’는 김영길 총장이 말하는 ‘위기’와는 다른 차원인 것 같습니다. 그저 교수임용에 대한 문제가 아니라, ‘대학’이란 무릇 어떠해야 하는 가에 대한 물음 또한 얽혀 있다고 봅니다. 하지만, 이 ‘위기’는 비단 한동대학교만의 문제는 아니어서, 저로서는 도저히 대답을 시도하는 것조차 불가능하다고 고백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